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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본 기자의 성장과정, '이제는 말할 수 있다'(1)지긋지긋한 가난 속에 피어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오명관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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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9.15  15:4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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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태어난 곳은 전주시 팔복동 어느 한 가정집. 한 여름의 열기가 있던 1971년 7월 26일 오후에 이 땅에 나오려고 했던 날, 아버지(2003년 당뇨합병증으로 사망)는 노름에 빠져 어머니 혼자 절 낳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집주인도 만삭이었는데 제가 먼저 이 땅에 나오려고 하자, 옛날 풍습에 의해 주인집보다 하인(?)집의 아이가 먼저 태어나면 안된다고 해 급하게 어느 허름한 창고를 빌려 절 낳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주인집과 월세사는 관계가 마치 주인집과 하인집과 같은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태어난 제 모습을 본 어머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너무나 작고 아이가 곧 죽게 생겼다고 했답니다. 당시 아이를 받아줬던 산파는 “불쌍해서 어쩌누”라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생신고도 못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당시에 굉장히 비쌌던 분유를 구입해 먹이려고 했지만 전 먹질 않고 오로지 모유만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무색하게 잘 자랐고 출생신고 시기를 놓쳐 과태료를 물어야 했지만 3년 후 자진신고 기간이 돼 그때서야 했다고 합니다.

이사도 참 많이 다녔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팔복동에서 태어난 저는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부모님은 완주군 초포(지금은 전주)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사실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날은 제가 잠을 자지 않고 계속 울고 보챘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잠에서 깨어나 절 재우려고 해도 울기만 해 짜증을 냈다고 하는데 연탄가스 냄새가 났다고 하더랍니다. 결국 제가 잠을 자지 않아 연탄가스로 죽을 수 있었던 그 상황을 모면했다고 합니다.

이후 6~7세 쯤으로 전북 완주군 경천면(당시에는 완주군 운주면 경천리)에서 살았고, 전주 인후동으로 이사합니다. 그리고 8세가 되던 해인 1978년에 전주 동북초교에 입학했습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당시 어머니는 시장에서 포장마차(어묵, 튀김 등 분식류 판매)를 했고 아버지는 여전히 노름에 빠져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밥을 먹는다는 것은 사치였고 굶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한 겨울에는 연탄이 없어 어린 제가 주인집에 찾아가 연탄을 빌려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계속 빌렸지만 면목이 없어 절 보냈던 것이지요. 이곳에서 2번 째 동생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고요.

학교에서 시험을 보면 전 과목 100점을 맞아 성적표를 들고 어머니에게 보여주면 우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나 2학년 때에는 전주 평화동 흑석골로 이사합니다. 학교는 전주 남초교로 전학하게 됩니다.

이곳에서는 제지공장이 있어 한지를 만드는 공장에서 부모님이 일을 했고 공장에 있는 방 한 칸 짜리에서 부모님과 저, 여동생, 남동생이 이렇게 지냈습니다.

이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살았지만 이사만 총 4번을 이사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제지 공장에서 아버지는 한지를 뜨고(발에 종이물을 몇 번 씩 흘러 채 거르듯 하는 일) 어머니는 말리는 작업을 하셨는데 한 여름에는 뜨거운 철판의 열기로 땀띠가 날 정도로 무지 더웠습니다. 어린 나이였던 전 이곳에서 일을 도왔습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곳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1981년에 막내 동생이 태어났습니다.(2005년에 교통사고로 사망) 여동생은 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긴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느 날, 점심시간에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었는데 6학년 선배들이 장난으로 조그만한 자갈을 던지며 놀다가 제 친구 이마에 맞아 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냥 교실로 들어갔고 친구는 양호실로 들어가 치료 받고 그대로 끝났습니다. 지금같으면 난리 났겠지만 당시에는 그냥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전 6학년 교실을 돌며 끝까지 찾아냈고 친구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해 끝내 사과를 받아낸 적이 있습니다.

이보다 앞선 4학년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절 나오라고 하더니 봉투를 주는 것입니다. 금액은 아마 1만원 정도? 잘 기억은 나진 않지만 그 당시에는 큰 금액인 것으로 압니다.

부모님에게 드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 어린 마음에 영문도 모른 채, 드렸더니 마구 우셨던 기억도 납니다. 알고보니 당시에는 연말이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걷었습니다. 물론 저도 부모님으로 받아 100원을 낸 적이 있는데 바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문배달도 했습니다. 월급으로는 2만 원이 조금 넘는 정도였고 3개월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석간신문이었기에 학교 끝나고 배달했습니다. 특히 자전거에 신문을 싣고 전주 완산칠봉으로 배달갈 때면 죽을 맛이었습니다. 한없이 올라야만 했던 오르막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주민들은 시원한 물과 음료수를 주며 고생한다고 했던 기억이 나고 그 밑으로 오면 사찰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도 신문을 배달했기에 음식을 주기도 해 배를 채웠던 기억도 납니다.

당시 버스 안내양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이모 친구분들도 있었기에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으면 배달하고 남은 신문을 안내양(이모 친구들)들이 사주기도 해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다 배달하고 나면 저녁 때가 되거든요.

5학년 가을 쯤에 전주 소양면으로 이사합니다. 전주 소양초교로 전학했지요. 다리목이라는 곳인데 이곳에 제지공장이 있었습니다. 학교는 걸어서 약 1시간 거리. 매일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습니다. 당시 버스비 50원. 100원을 받아 학교에 등하교 하는데 버스 정류장에 늘 있는 분식집. 핫도그가 50원이었습니다. 하도 배고파 여동생을 꼬셔 핫도그를 사먹고 조그만한 도로를 걸어서 집에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남동생 2명은 밖으로 못나오도록 방문에 동생들 키만한 높이로 막아놨습니다. 때론 문을 잠그기도 했지요. 부모님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저와 여동생은 학교에 가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배가 고팠던 남동생 2명은 비상용으로 있었던 약을 마구 먹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아무리 재워려고 해도 잠을 자지 않고 뜬 눈으로 지새우더니 횡설수설하고 눈은 흰자위가 보일 정도로 이상했습니다.

병원에 가기 위해 전주로 데리고 나온 아버지는 동생들을 통제하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합니다. 자꾸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차가 오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가려고 말입니다.

알고보니 약물중독이라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약을 너무 먹어서 그랬고 만약 그날 잤다면 그날로 죽었을 것이라고요. 우리 가족은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6학년 봄에 전주로 이사갑니다. 전주 평화동 장승백이. 분식집을 연 부모님은 열심히 일을 했고 전 전주 평화초교로 전학했는데 처음 동북초교에서 입학했던 당시 담임선생님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6학년 가을에 군산으로 다시 이사갑니다.

군산 신풍초교. 이곳에서는 축구부가 있어 축구선수로 성공하겠노라고 선수로 활동했으나 꿈은 이뤄지지 않았고 군산중학교로 입학했습니다. 군산중학교는 김성한 전 해태타이거즈 선수였던 모교입니다.

어느 날, 야구부 코치가 왼손잡이었던 저에게 운동을 해보라고 권유했지만 돈이 많이 든다는 말에 포기하고 피해 다녔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야구부에는 왼손잡이가 매우 귀했던 시기였습니다.

전 이곳에서는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군산으로 전학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중학교로 입학했기에 친한 친구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반친구로부터 시달림을 당해야 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왕따지요. 늘 괴롭힘 당하는...

그런데 절 괴롭혔던 그 친구는 퇴학을 당했습니다. 저 때문이 아니라 다른 건으로요. 그리고 훗날 군대(단기사병 신교대)에서 같은 내무반에 배정돼 생활하는 운명을 맞았고 이 때 그 친구는 생각이 잘 안난다면서도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인생은 참으로 재미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지만 집에다가 말도 못하고 그냥 학교에 다녔고 늘 교회로 달려가 교회 형들과 어울리며 놀았습니다. 초등학교 마지막 연말고사에서 전교 2등으로 졸업했고 중학교에서 첫 시험인 반편성고사에서 상위권에 들어갔지만 이후부터 성적은 하위권으로 떨어져 더 이상 오르지 않았습니다.

잦은 부부싸움. 사춘기였던 저는 늘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아마도 이 시기에 교회에 가지 않았다면 제 인생은 또 다른 길이었을 것입니다. 현재 군산 은파유원지 근처에 있는 은파교회 담임목사가 제 친구인데 당시 다녔던 교회 목사님 아들입니다. 나운동에 있었던 신광감리교회가 이전하면서 바뀐 것입니다.

부모님의 잦은 다툼으로 인해 방황하던 시기로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고 바로 교회로 갑니다. 그러면 사모님께서 점심을 줬고 오후에는 교회 화장실 청소, 교회 주보 인쇄(당시에는 윤전기와 같은 도르레같은 것으로 인쇄하던 시기), 성가대 연습 등 온전히 교회에 있었고 잠도 역시 교회 교육관에서 자고 다음 날 주일은 저녁 예배끝날 때까지 있었습니다.

이 때 장애인에 대한 아픔을 겪었습니다. 어느 주일 오후, 당시에는 익산에 기독교방송국이 있어 장애인에 대한 방송이 있다고 해 시각장애인 어른 1명과 뇌성마비 형 1명과 함께 버스로 익산에 갔습니다. 방송을 마친 후, 다시 군산으로 오던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간이터미널에서 내린 우린 택시를 잡으려고 해도 택시들은 그냥 모른 척 지나갑니다. 휠체어에 타고 있는 뇌성마비 형과 시각장애인 그리고 전 비를 약 30여 분 간 맞으면 택시가 서 주길 기다렸지만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청년 같았습니다. 어떤 분이 택시 한 대를 가로 막더니 우릴 타라고 해 겨우 교회로 도착한 적이 있었고 이후 전 장애인에 대한 고충도 많다는 것을 그 때서야 알았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트라우마가 매우 컸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기독교방송(CBS)에 대한 탄압이 있던 시기로 뉴스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통폐합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서명운동에도 적극적이었고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당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자 아나운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일부터 저희 기독교방송은 뉴스보도를 중단하고 온전하게 하나님 말씀만 전하는 방송으로 거듭납니다”라는 식으로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자꾸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전 언론에 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사실상 성적이 좋지 않아 꿈도 못꿨습니다. 당시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도해 미움을 사 사실상 언론기능을 마비시켰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전 기자가 된다면 권력에 맞서 비판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하지만 제 성적으로는 할 수 없는 마음만 굴뚝같은...

또한 중학교 1학년 때,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놀고 있는데 운동장 한 켠에 있는 언덕 비슷한 곳에서 같은 반 친구가 누군가로부터 맞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 친구하고는 그리 친하지도 않았지만 분명 반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맞더구요. 그래서 전 잘 못하는 욕설을 하며 뛰어가 “왜 제 친구를 때리냐”고 따져서 다가갔더니 3학년 형들이었습니다. 속으로 ‘아뿔사’, 그렇지만 그대로 밀고 갔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형들은 절 보더니 저에게 욕을 하면서 하교 후에 보자고 하더군요. 하지만 보자고 했던 그 형들은 절 찾지 않았고 별 탓 없이 넘어갔지요.

전 그렇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외면하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불의와 타협하는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음해를 당하고 손해를 많이 입기도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저희 어머니께서 어느 정도 아부하면서 살라고...

하지만 한 번 몸에 뵌 성격이 어느 쉽게 변하겠습니까? 그래서 가난한 아이들과 어렵게 사는 어르신들을 보면 외면하지 못합니다. 제가 너무 어렵게 자랐고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권력에 대해서는 단호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잘못하면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하기 때문이죠.

또한 기독교 정신이 절 지배했기에 100% 깨끗하게 살지는 못하겠지만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하지 말고 상식 안에서 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야기를 이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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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
진솔하신 분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언젠간 나올 2탄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2017-12-28 21:38:28)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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