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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전주박물관 특별전, '시간을 거슬러 익산을 만나다'부흥의 터전, 전라도의 첫 고을
익산시민뉴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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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1.09  0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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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전북역사문물전’ 열두 번째 ‘익산’ 특별전이 내년 2월 9일까지 국립 전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전주박물관 소장 유물을 비롯해 미륵사지유물전시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등 전국 각지 익산 관련 유물과 전시품을 한자리서 만날 수 있다.

부흥의 터전, 익산

익산지역은 위만에게 쫓긴 고조선 준왕이 내려와 재기를 꿈꾸던 곳이며, 백제 무왕 역시 익산을 발판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 이후에도 익산지역에는 재기와 부흥을 꿈꾸는 무리가 모여들었다. 안승(安勝)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이 세운 보덕국(報德國)은 674년부터 10여 년간 익산에 터를 잡았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867~936)은 후백제 건국의 정신적 뿌리를 금마산 즉 익산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미륵사개탑(彌勒寺開塔)이나 왕궁리 오층석탑 조성, 사리의 재봉안 등 익산지역에서의 다양한 불사(佛事)를 통해 백제를 계승했음을 대내외에 드러냈다.

왕궁리오층석탑의 해체,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금동불상은 대좌와 함께 주조한 금동불에 얇게 투각한 당초무늬와 불꽃무늬의 거신(擧身)광배를 결합한 형식이다. 뒷면의 주조 구멍은 머리에는 없고 몸 전면에서 다리까지 큼직하게 뚫려 있는데, 내부의 주물이 매우 거칠다. 목 아랫부분에는 광배를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도록 촉이 달려 있다.

이 금동불처럼 광배까지 한 세트로 온전히 전하는 통일신라 말의 불상은 많지 않다. 출토지가 후백제 영역이었던 익산 왕궁리인 점에서 제작시기를 비롯하여 발원자의 문제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불심 가득한 땅

고려시대에는 산과 물가에 사찰, 탑, 석불 등을 조성하였는데, 이는 지세가 약한 곳이나 거스르는 곳에 사찰, 탑, 석불을 조성하여 보완할 수 있다는 도선의 비보사탑설(裨補寺塔設)에 따른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번성한 익산지역의 사찰은 삼국시대에 창건된 미륵사(彌勒寺)를 비롯하여, 심곡사(深谷寺)․숭림사(崇林寺) 등이 있다.

고려말~조선초에 만들어진 숭림사 청동은입인동문향로(靑棟銀入忍冬文香爐)는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높이 14.6㎝로 뚜껑 중앙부에 사자상의 손잡이가 있고, 옆구리에는 사자머리형의 손잡이가 조각되어 있으며, 금으로 모란, 당초문을 은입사하였다.

전라도의 첫 고을

‘춘향가’에서 이몽룡은 남원으로 내려갈 때 서리(書吏)와 역졸(驛卒)들에게 ‘전라도 초입(初入), 여산읍’에 가서 기다리라 말한다. 이 여산읍이 바로 익산 여산이다. 익산은 충청남도에서 전라북도로 넘어오는 첫 길목이자, 첫 고을이었다.

순금제불상이 발견된 곳은 여산면 원수리 삼양마을 북쪽 용화산 중턱에 있는 도신사터(도승사터라고도 함)라고 전해오는 절터이다. 이 불상은 높이 5cm 정도의 2층 연화좌대에 앉혀있고 등 뒤로는 주형의 화염문과 당초문으로 꾸며진 광배가 붙어있다.

불상은 크고 긴 눈, 짧은 코와 작은 입을 가졌고, 오른쪽 어깨에 걸쳐있는 법의는 부드럽게 흘러내려 결가부좌한 무릎 위를 덮었다. 뒤판의 상단 중간과 하단 좌우측에는 끈을 꿸 수 있는 작은 고리가 있다. 연당초문 그리고 기타의 수법 등과 불상의 광배 뒷면에 ‘남선인(男善人) 신축정월일(莘丑正月日) 김세소(金世昭)’라는 명문이 남아있어 만든 시기는 1361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웃한 네 고을

조선시대 익산지역은 여산(廬山), 용안(龍安), 함열(咸悅), 익산(益山) 네 개의 고을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네 고을은 1895년 목(牧)․부(俯)․군(郡)․현(縣)의 명칭을 군으로 통일하고 23부에 예속시키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할 때 여산군, 함열군, 용안군, 익산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전주부의 관할이 되었다. 1914년에 네 개의 군은 통폐합되어 익산군이 되면서, 비로소 한 고을이 되었다.

익산이 품고 낳은 사람들

조선시대 익산지역에서는 여러 방면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또 모여들었으며, 죽어서 묻혔다. 관계(官界)를 대표하는 인물로 좌찬성에 이른 소세양(1486~1562)을 들 수 있으며, 학계(學界)를 대표하는 인물은 훗날 노론과 소론 사이 논쟁의 단초가 된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지은 유계(1607~1664)가 있다.

이밖에도 다방면에서 인물을 배출한 연안이씨(延安李氏) 집안사람들, 초서를 잘 썼던 호산(湖山) 서홍순(1798~?), 원불교의 창시자 박중빈(1891~1943)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근대도시 익산의 명과 암

전라도의 근대도시 하면 군산을 많이 떠올린다. 군산은 근대도시이자 일제에 의한 수탈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된 많은 미곡(米穀)은 군산의 배후에 있는 익산과 김제평야에서 나온 것들이다.

특히 호남선과 군산선 등의 철도부설과 일본인들의 이주로 익산의 새로운 중심이 된 이리지역은 근대도시로의 발전이 가속화되었지만, 익산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농장과 수리조합의 결탁으로 익산 사람 대부분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졌으며, 이에 대항하여 소작쟁의(小作爭議)와 수리조합반대운동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익산시청 고도문화재과ㆍ홍보담당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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