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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익산의 4월4일, '꼭 기억해야 합니다'익산 구시장(남부시장)에서 일어난 '4.4만세운동'
오명관 기자  |  iscm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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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2  22: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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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인 1919년 4월 4일 솜리 장날 대교농장(현 남부시장 인근) 앞에서 일어난 ‘4.4익산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을 때 오산 김내문의 집에서 아들 김만순, 최대위 목사, 김영인 선생과 함경도 갑산탄광에서 금광사업을 하면서 독립자금을 조달해 만주 등으로 송금 하는 등 구국운동에 열중하던 문용기 선생이 3월 중순경 김내문 씨를 찾아 4월 4일 낮 12시를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 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

   
 

4월4일 만세운동의 전초전으로 익산 각지에서 발발한 3.1만세운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이나 호남선 열차승객이 많이 몰려드는 기차역을 활용하는 운동방법이었다.

이리역에 일본보병 제 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면서 전주, 군산, 김제, 정읍 방면으로 왕래하는 승객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 때의 정황은 역 안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4월.4일 거사에 앞서 3월 27일과 29일에는 승객들이 많이 몰려있는 대합실과 승강장 안에 열차가 서있는 플랫폼(platform)과 열차 안쪽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 일제강점기 시절 익산의 쌀을 수탈해갔던 대교농장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개인 소유의 땅이다보니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돌담으로 둘러져 있어 문화적 가치로도 매우 높다.(사진 = 오명관)

김만순, 정진영, 문용기, 박영문, 김병수, 오덕근, 박병렬 등 수십 명의 기독교측 지휘본부는 조를 지어 승객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했다. 각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재래식 복사기 가리방(일어)으로 독립선언서를 수 만장씩 제작하고 놓고 승객들에게 배포했다.

선언문의 내용을 확인한 수백 명의 승객들이 기차가 잠시 멈춘 사이에 밖으로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외쳤고 기차가 떠나버리고 나면 일본 헌병들은 먼 산만 바라보는 꼴이 됐다. 지도자들의 이러한 특별한 운동 전략은 3.1만세운동을 4.4만세 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또 하나의 전략이 된 셈이다.

이렇게 3월 초부터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에게 있어 4월 4일은 일제가 이 땅에서 감행한 폭압적 통치의 종지부를 찍겠다는 디-데이(D-day)날이었다.

기독교측 지도자 문용기, 김내문, 정진영, 최대진, 박영문, 오덕근, 박병렬, 박공업, 백낙규 등과 천도교 지도자 박영진, 이중렬, 이유상, 송일성, 이형우, 노충만, 최재봉 등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수 만 장씩 준비하는 등 이들에게 있어 4월 4일은 생명과 젊음을 바쳐 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기필코 쟁취해야만 하는 최후의 날이었다.

오산면 남전교회에서는 김내문 집에 모여 여러차례 숙의한 대로 이날 시위는 3대로 나눠 편성하고 1대는 최대진 목사(당시 최목사는 노회로 인해 참여하지 못함 - 김영인 교사의 요청으로 실제로는 최대위 학생이 주도)가 이리역과 평화동 쪽에서 대교농장으로 진출했다.

2대는 문용기 선생이 무내미 방향에서 구 시장으로, 3대는 김내문 감찰의 아들인 김만순이 동이리 방면에서 구 시장으로 진출해 한곳으로 운집된 대열은 수백 명의 전위대로 기세를 높였다.

   
▲ 일제강점기 시절 익산의 쌀을 수탈해갔던 대교농장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개인 소유의 땅이다보니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돌담으로 둘러져 있어 문화적 가치로도 매우 높다.(사진 = 오명관)

문용기 선생의 곁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된 이래 항상 잔심부름을 도맡아오던 서울 중동학교에 재학 중인 김종현, 김철환, 이시웅, 최대위 등과 3월 4일 군산시위를 촉발시킨 쎄브란스 의전에 김병수 학생과 또는 익산지역의 민립학교 학생들로 남전 도남학교 김영인 선생을 필두로 동련 개동학교, 고현 경신여숙, 춘포와 웅포 지역민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참여 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민족지도자 문용기 선생은 대열의 앞에 서서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폭로하고 우리민족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일으켜 나가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큰소리로 외쳤다.

계속해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을 높이 들고 300여 민족운동 지도자들 앞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점점 독립의지에 충천된 대열은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앞을 향해 나갔다.

시위 군중의 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늘어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당황한 일본 헌병대가 대열을 제제하려 하렸지만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 마는 대열이 아니었다.

독립을 열망하는 그들의 정신은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일사 각오가 돼있는 투사들이였기 때문에 일본 헌병들은 그 위세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위협을 느낀 일본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탄을 난사하기 시작했고, 앞에서 시위를 이끌던 지휘부 인사들도 일사각오로 무장돼 있었기 때문에 일보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을 보였다.

   
▲ 일제강점기 시절 익산의 쌀을 수탈해갔던 대교농장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개인 소유의 땅이다보니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돌담으로 둘러져 있어 문화적 가치로도 매우 높다.(사진 = 오명관)

그러나 쏟아지는 총탄 앞에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쳐나간 이들은 팔봉 배못(현 이제마을)에 사는 김종길(남풍이)선생이 다리와 머리에 총을 맞고 ‘억’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김종길 선생은 머리와 다리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많이 흘려 이미 숨이 끊어지고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저녁 무렵에 기력이 되돌아 왔으나 평생을 뇌성마비 환자로 살 수 밖에 없었다.

오산면 남참부락의 제3대로 참여한 김만순이 동이리 방면에서 대열에 합류해 “우리나라를 빼앗기느냐 다시 찾느냐 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여러분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대한독립만세을 외쳐 나갑시다”며 기세높여 나갈 때 자기집 머슴으로 참여하던 장경춘이 총에 맞아 ‘억’하고 쓰러지면서 선혈이 난자하니 대열은 잠시 흐트러질 듯 했다.

또한 그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외치던 박도현, 서정만도 이미 총에 맞아 땅바닥에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었다.

박병렬, 오덕근, 장노와, 김병수와 여러 학생들도 총과 칼에 찔려 붉은 피가 저고리를 적셔 내리고 있었다.
백낙규, 박공업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 박영진, 이중렬, 이유상 등 천도교 대표급 인사들도 중상을 입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또 외쳐 나갔다.

결국 이날 문용기, 장경춘, 박도현, 서공유, 이충규, 박영문 등 6명의 애국지사가 만세를 외치다 순국하시고 수십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내일은 열사들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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