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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의 꼬마신랑 박영문 열사 순국...4.4만세운동문용기 열사, 두 팔이 잘리는 순간에도 '조선독립만세' 외치며 순국
오명관 기자  |  iscm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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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3  21: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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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의 꼬마신랑 박영문 열사의 순국

결혼식을 올린 지 겨우 2개월도 지나지 않은 새신랑 박영문 열사는 아버지 박응춘과 어머니 이양신 그의 아내와 함께 아침식사를 마치고 만세현장으로 가기 위해 마당으로 나왔고 그의 신부도 신랑을 따라 나왔다.

   
 

그의 신부가 싸리문 기둥을 잡고 서서 "무사히 다녀오라"고 인사를 한 그녀를 바라 본 박영문 열사는 겨우 16살의 어린 신랑이었다. 신부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인사 소리를 뒤로 한 채 그의 생각에는 오로지 만세현장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의 어린 신부는 멀리 사라져 가는 신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사하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그 신혼부부에게 이순간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될 줄이야 꿈에서나 생각 했을까?

현장에 도착한 박영문 열사는 서울에서 급파한 김병수와 김종현, 김철환, 이시형 등 익산지역의 민립학교 학생들과 같이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수백 명의 독립인사 들에게 배포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만세운동이 시작됐고 큰 깃발을 높이 든 문용기 선생의 등 뒤에서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는 그에게 착검한 일본 헌병들이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그의 복부를 사정없이 찌르고 총 개머리로 강타했고 그는 배를 움켜쥐고 앞으로 ‘억’하고 쓰러졌다. 그러나 대한독립을 위해서는 이대로 죽을 수가 없다는 신념으로 다시 일어났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은 다른 사람들을 뒤쫓다가 박영문 열사가 서 있는 쪽으로 달려와 사정없이 그의 가슴과 이미 큰상처가 있는 배를 다시 찔렀다. 붉은 피가 적삼을 적셔 내리면서 밖으로 내품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서려는 순간 찰상을 입은 복부에서 내장이 땅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는 양손으로 쏟아지는 장기를 웅 켜 쥔 채로 다시 일어서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모든 기력이 탕진된 상태였기에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이렇게 박영문 열사는 16세의 도남학교 학생회장으로 민족해방의 제단 앞에 거룩하고도 숭고한 투혼을 발휘하며 순국했다.

싸늘한 주검이 된 꼬마신랑 박영문 열사는 지게 위에 올려져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하늘이 꺼지고 땅이 무너지는 슬픔에 오열했고 그의 어린 꼬마 신부는 아침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웃어주던 그의 뒷 모습이 떠올랐다. 그토록 사랑하는 신랑이 헌병의 총칼에 싸늘한 주검이 된 모습을 바라본 신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감내하지 못해 끝내 실신하고 말았다.(박영문 열사의 사진을 찾질 못해 아쉽기만 하다.)

문용기 열사의 독립운동과 순국

대열의 맨 앞에서 시종 시위를 이끌어 나가던 문용기 선생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고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앞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헌병대 뒤에서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몇 명의 악질 헌병은 그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와 긴 칼을 높이 들어 만세를 부르고 있는 그의 오른손을 내리쳤다. 만세소리와 함께 태극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높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며 나갔으나 극악무도한 일제의 헌병은 또다시 그의 왼손을 내려치니 태극기가 다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다시 일어나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다시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앞을 향해 나갔고, 일본 헌병들은 다시 달려들어 착검한 총으로 사정없이 옆구리와 배를 찌르고 쓰러져 있는 그의 머리를 가격했다.

결국 문용기 열사는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를 조선독립에 바치오” 라고 크게 외치며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편 이리 즉 익산의 독립운동은 3월 3일 여산과 웅포 장을 시작으로 3월 10일에는 여산 읍과 16개 면 전역에서 소규모적인 그룹시위가 일어났다. 3월 16일과 18일에는 금마장과 3월 27일에는 춘포와 삼기, 황등 지역에서 독립을 갈망하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28일 이후부터는 사람들이 집결하는 공공장소나 익산역(당시 이리역)을 중심으로 점점 가열되는 양상을 보였고, 급기야 4월 4일에는 수 천 명의 시민들이 격렬한 군중대회를 전개해 나가다가 6명이 순국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해 개정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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