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가람시조문학상 본상 수상작

잡기 (雜器) / 김영재

사발이 되려거든 막사발쯤 되어라
청자도 백자도 아닌 이도다완 井戶茶碗 막사발
일본국 국보로 앉아 고려 숨결 증언하는
백성의 밥그릇이었다가
막걸리 사발이었다가
삐뚤삐뚤 생김새
거칠고도 투박하다
용처가 저잣거리라 잡기雜器라고 했던가
무사함이 귀인貴人이요, 단지 조작하지 마라*
임제록臨濟錄을 바친 그윽한 속뜻 있어
본색이 천한 것 아니라 백성의 밥그릇이었거늘
*임제록의 한 구절을 일본인 무네요시(柳宗梲)가 이도다완에 바쳤다 함.

-2008년 겨울호 「시조시학」

폐광 (廢鑛) 정용국

(1)
혼이 빠져나간 자리
녹슨 금강경 몇줄

공양도 마다한 채
긴 안거에 들어 있다.

순순히
소신燒燼한 몸을
애물처럼 붙안고

(2)
혈穴마다 진津을 빼고
뭉개 놓은 행간行間엔

임시방편 허기들이
아우성을 치는데

사초史草는
변명도 없이
긴 한숨만 내쉰다.
-「개화」 17집, 2008년

가람시조문학상 심사평(2009년)

시조를 통한 역사적 성찰과 새로운 상상력의 확장

민족문학에 대한 새로운 위상정립과 궤를 같이해온 가람시조문학상은 이제 그 전통과 권위라는 측면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시조문학상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자유시라는 새로운 양식이 대세였던 시기였음에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민족시인 시조를 올곧게 지켜낸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선생의 고결한 시정신이 뒷받침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가람시조문학상은 이 같은 선생의 시 정신을 새롭게 인식하고 국제화시대의 문화자산을 확보하기 위하여 선생의 고향인 익산시가 제정한 상이다.

특히 금년부터는 등단 10년 미만의 신인들을 발굴하여 격려하기 위한 신인상을 새롭게 제정하여 한층 더 그 품격을 높여놓았다. 이러한 상의 권위와 시대적 역할을 감안하여 심사위원회는 그 취지에 걸맞은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하여 많은 고심을 하였다.

먼저 본상의 경우 최종 추천된 세분의 작품을 놓고 작품성과 시정신 등에 대하여 오랜 숙고와 논의를 거듭한 끝에 김영재 시인의 「잡기」를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물론 함께 추천된 다른 시인들의 작품성 또한 전혀 손색이 없어 마지막까지 경합하였음을 밝혀둔다..

수상작 「잡기」는 조선의 민초들이 사용하였던 막사발에 대한 재발견으로 민족혼을 일깨워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그것도 우리 자신의 자각을 이끌어낸 일본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찬사를 예시해 줌으로서 객관성과 보편적 가치를 함께 확보하고 있다.

더욱이 더러 시조의 장르적 한계로 지적 받아왔던 작위적 가치관과 보신적 감정표현, 자연에 대한 단순서정을 역사적 성찰이라는 소재의 확장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하였다는 점에서도 공감대를 높여주었다.

수상자 김영재 시인은 이미 문단 경력이 35년에 이르는 중진이다. 그간 왕성한 작품발표를 통하여 이미 김영재류의 시조질서를 보여준 바 있다. 그럼에도 근년에 보여준 왕성한 작품창작과 새로운 시도가 많은 시인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금년도 새롭게 신설한 신인상의 경우는 경쟁이 더욱 치열하였다. 신인상의 경우 그들의 작품성과가 시조문학의 미래를 저울질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 분의 작품들을 정독한 끝에 정용국의 「폐광」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수상작인 「폐광」은 신인이 갖추어야할 덕목인 패기와 실험정신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주어진 역할을 다한 폐광을 통하여 수행자의 모습을 발견한 대목이나 문명 비판적 접근이 곧 그것이다. 완성도면에서 다소 미흡함이 지적되었으나 신인이라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읽었던 것이다.

수상하신 분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이 번 수상을 계기로 가람 이병기 선생의 문학정신을 계승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009.3.27.

제29회 가람시조문학상 심사위원회
위원장/ 채규판, 위원/ 김제현, 한분순, 민병도, 이석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