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생활 속의 유머(humour) 한마디는 고단한 삶에 활력을 주기도하고 때로는 답답한 인생에 활로를 열어 주기도 한다. 날카로운 설전(舌戰)이 오고가는 정치현장에서 촌철살인(寸鐵殺人)하는 유머는 정치적 긴장이나 갈등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여유도 주고 또 사태를 푸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 맑은정치포럼대표ㆍ정치학박사 이동우

20세기 석학인 중국의 문명비평가 ‘린위탕’(林語堂:1895~1976)은 ‘유머감각은 문화생활의 내용을 변화시킬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흔히들 서양은 유머가 넘치는 유머 과밀(過密)지대요 동양은 유머를 찾기 힘든 유머 과소(過小)지대라고 한다.

사람을 잘 웃기거나 또 잘 웃으면 실없는 사람이라는 통념이 지금도 통하고 있는 한국이긴 하지만, 옛날 우리의 뛰어났던 정치가들은 유머감각이 풍부했으며 그 유머로 긴장과 갈등을 해소한 사례도 많았다.

우리에게 ‘오성(이항복)과 한음(이덕형)’으로 잘 알려진 조선 선조 때 정승 ‘백사 이항복’은 유머를 정치현장에서 잘 활용한 대표적인 정치가였다.(사적으로 이항복은 필자의 ‘경주 이’씨 선조이다).

당시 동서당쟁으로 임진왜란을 야기 시켜 놓고도 피난 가서까지 삿대질하며 언쟁을 계속하자, 이항복이 나서서는 “우리가 참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이렇게 싸움을 잘하는 동인들로 동해를 막게 하고 서인들로 서해를 막게 했으면 왜놈들이 어떻게 침략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야 깨닫게 되니 참으로 원통합니다.”......

어느 날 공리공론으로 싸움만 일삼는 조정에 이항복이 늦게 나타났다. 이때 “대감 웬일로 늦었소?”하고 묻자. “오는 길에 싸움구경 좀 하느라 늦었습니다.” “무슨 싸움이길래요?” “삭발한 승려가 환관(宦官)과 싸우는데 승려는 환관의 신낭(腎囊)을 잡고 환관은 승려의 머리를 잡고 싸우고 있습디다.” 이항복은 소득 없는 당쟁을 이렇게 풍자하여 주위를 숙연케 했던 것이다.

전 미국 대통령 부인 로라 부시(아버지 부시)는 한 TV대담프로에 출연하여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걸핏하면 크로퍼드(목장이 있는 곳)로 달려가지만 사실 목장 일은 잘 모른다. 한번은 말 젖을 짜겠다며 수컷과 씨름을 하고 있더라.”...... 물론, 몇 차례의 전략회의와 리허설 등 치밀한 사전 각본에 의해 준비된 유머였지만, 그만큼 유머의 정치적 효과가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영화배우 출신 최초의 미국대통령 레이건의 일화 중 하나이다. 1981년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의 스토커였던 “힝클리”라는 사람이 포스터의 관심을 받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에게 총을 발사했다.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대에 오른 레이건 대통령이 간호사에게 윙크를 하면서 한 첫 말이다. “낸시(레이건 대통령 부인)는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을 모르겠지?”

수술직전에 의사들에게는 “당신들은 모두 공화당원(레이건은 공화당출신이다)이지요?”라고 농담을 했다. 이에 주치의 답변은 더 멋있다.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 우리는 최소한 오늘만은 전부 공화당원입니다.” 이윽고 수술대에서 회복한 레이건은 주위 사람들에게 한 번 더 여유를 부린다. “내가 헐리우드에서 이렇게 저격당할 정도로 주목을 끌었다면 절대로 영화배우를 그만두지 않았을 텐데......”

이윽고 놀란 가슴으로 병원에 도착한 ‘낸시’여사에게는 “여보, 내가 총알을 피해 살짝 엎드리는 걸 깜빡했네! 내 양복 중에 제일 비싼 양복인데 구멍이 나서 어떻하지?”라고 말하며 주위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위기 시에 지도자의 번뜩이는 유머와 재치가 무척이나 부럽다. 이런 대통령을 지켜본 미국 국민들은 얼마나 든든했을까?

한국정치는 그동안 여러 측면에서 비약적인 변화와 개혁을 이뤘지만, 유머 문화는 갈수록 척박해져가는 느낌이다. ‘상대를 망가뜨려야 내가 산다’는 네거티브 정치전략 때문에 경멸과 조소 일색의 ‘저질 유머’만 득세할 뿐, ‘유머의 정치’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듯하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은근한 익살과 해학을 즐겼다. 정치의 세계에서 그런 전통이 되살아날 수만 있다면, 정치인과 국민들의 정신건강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대체로 멋없는 우리 정치인들에게 성숙되길 기대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유머감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