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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100주년, 익산의 독립운동史
오명관 기자  |  iscm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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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25  20: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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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덕근 독립운동가
58세때 3월10일 익산 16개면에서 햇불봉화 만세운동, 16일 이리역철도 만세운동, 4월 4일 이리장날 만세운동을 하다가 중상을 입고 구속됐다.

- 문용기 열사
1878년 익산출생으로 군산 영명학교 재직시 이승만, 박연세, 김좌진 등과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이리장날 만세운동(44운동)때 선봉에 나섰다가 일본헌병의 칼에 찔려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 유장열 의병총사령관
1917년 10월 초순경 의병 280명을 이끌고 일본 기마병과 격전을 치르기도 했는데 특히 기관총과 현대식 군도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양군이 모두 살육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또 의병들은 전국에 걸쳐 친일파 처단, 헌병대 주제소 습격, 무기탈취 등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을 괴롭혀 왔고 해방이 되자 익산에서 민족의 새로운 건국을 꿈꾸었지만 향년 83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외에도 익산에서 활동했던 많은 운동가가 있다.
권우진 목사 : 신사참배 반대운동 하다 옥고를 치른 후 42세로 생을 마감)
김병수 열사 : 항일민족학생운동(세브란스의전에 재학중 군산, 익산에서 3.1운동 주도)
장지환 열사 : 항일민족학생운동(이리농림학교 재학중 후방 게릴라투쟁을 하다 실패해 체포당한 후 심한 고문으로 중병생활)
김직수 열사 : 항일민족학생운동(이리농림학교 재학중 후방 게릴라투쟁을 하다 실패해 체포당한 후 심한 고문으로 중병생활) 

익산의 3.1 독립운동사

Ⅰ. 독립운동의 배경

   
 

익산에서 일어난 3.1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전개됐다. 초기에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해 익산군(당시에는 익산시가 아니였음) 내 16개 면 전역에서 밤 9시를 기하여 봉화 시위를 촉발시켰다.

익산군민의 독립을 열망하는 3,1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각 면 소재지와 장터에서 점점 고조되던 가운데 4월 4일이 되자 오산 남전교회 사헌부 감찰인 김내문과 최대진 목사, 문용기, 박영문, 백낙규, 오덕근, 박병렬, 김병수 등의 기독교 지도부에 의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익산 농민수탈의 본부 대교농장 앞에서 폭발했다.

이글은 이들이 펼쳐나간 3.1 자주독립만세 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피고 일본 군국주의의 지휘 본부였던 구시장의 대교농장과 춘포 호소가 와가를 중심으로 한 독점 지배세력이 호남평야의 중심부 익산 땅에서 감행한 야수적 침략체계의 전모를 밝혀 나가려고 한다.

2. 침략체계의 근거

■ 1904년 3천 정보(약 2천9백7십5만㎡ㆍ900평)의 호소가 농장 전판농장 1907년 구 시장에 대교농장 등 30여 곳에 일본인이 대농장을 설립해 토지수탈의 전초기지화 한 점
■ 1906-1912년 금마에 있던 익산경찰서를 춘포 호소가 농장으로 이전하고 농장제정의 사비를 출원해 의병들의 공격에 대비 방어기지화 한 점
■ 익산 의병들과 민중의 저항이 두려워 일본군 기마대 2개 대대를 구 시장 대교농장에 주둔시켜놓고 동척지부를 세워 토지수탈의 본부였던 점
■ 1914년 호남선철도가 개통되기 전 1912년 이리 ― 군산선 철도를 먼저 개통하고 조선에서 생산한 곡물수탈의 전초기지화 한 점
■ 이리시 영정통(일본인거리)를 전략적으로 건설하고 각종 문화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일본인 조선인 자치위원회를 조직 정치 문화 경제수탈을 감행하여 나간 점
■ 신사참배 창씨개명 학교나 종교시설의 병영화 의병토벌작전 고대역사 말살정책 등 익산 지역의 민중들에게 감행한 민족말살정책의 전모를 밝히고 자주독립운동의 도화선으로 연결한 민중의 민족 민주운동을 밝힌다.

3. 3.1 독립만세운동의 개요

1) 일본인들의 나라

   
▲ 독립기념관에 광복을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설치한 인형들(사진 = 오명관)

일본인들이 몰려오기 그 이전의 솜리(이리ㆍ현 익산의 옛지명)지역은 사방 십리가 갈대밭으로 뒤 덮여 있는 구릉(丘陵)지로서 구시장 부근의 주현동과 갈산동에 걸쳐 10여 가구가 옹기종기모여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04년 충남의 공주 땅에서 수 십 만의 동학 농민군을 몰락시킨 일제는 민씨 일가의 버팀목이던 청ㆍ러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 후 조선땅을 강점하고 류쿠, 대만, 사할린, 요동반도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넓혀 갔다.

을사늑약(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정부의 박제순과 일본제국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 감행되기 1년 전인 1904년 오산면에 3000정보(약 2천9백7십5만㎡ㆍ900평) 의 땅을 헐값으로 매집해 진전(眞田)농장을 설립했다.

춘포에서는 일본의 후작(候爵) 호소가 와가(細川家)가 민영익의 소유인 1500정보(약 1천4백8십8만㎡ㆍ450평)1처의 땅을 서울에서 직접 매입함을 시작으로 1906년에는 다나가(田中德次郞)가 군산에서 이리로 이사하고 역전 한복판에 여관 개업을 효시로 일본 상인들이 몰려와 영정통과 역전에 일본인 위주의 상가를 건설했다.

1907년에는 일본본토 갓부현에서 대교은행을 경영하던 오오하시(大橋與市)가 에다오시를 대리인으로 파견하고 익산지역의 대부분의 땅을 매집, 익산의병들의 야음공격에 대비 자경단을 구성 사무원 하야호를 자경단의 단장을 뽑고 총과 칼로 무장시켰다.

그는 또 총독부를 움직여 일본군 수비대와 헌병2개 대대를 주둔시켜 전북일대는 익산과 군산에 일본의 대재벌들이 몰려와 50여 곳에 대규모의 농장을 설립하고 토지조사사업과 우체국, 주재소, 군청 등을 장악했다.

1908년에 전군도로의 개통 1909년에는 군산의 개항 1910년에는 군산-익산간의 철도를 개설해 곡물의 수송 등 경제침탈에 기세를 높여 나갔다. 충청이남 호남평야의 중심에 위치한 이리역이 전략적 교통 요충지인 만큼 조선경제수탈의 야욕을 품고 이리 지방으로 몰려 온 인구가 급격히 증가해 한일합방 당시에 익산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인구가 3백여 가구에서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은 이미 1912-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 조선의 국유지라고 하는 국장토역둔토 등을 강탈해 통감부 소유로 관리했다.

이후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인 대 농장에서 헐값으로 사들인 일제는 친일 부일배 몇 명을 제외하고는 99%에 농민이 까막눈인 점을 이용해 한문 등의 까다로운 서류를 만들어 등록하도록 하고 약속된 기간에 소유권 서류를 제출하지 못하면 농토를 강제로 빼앗아 버렸다.

소작농으로 전락한 우리농민은 1년 농사를 뼈가 빠지게 지어놓고도 소작료로 절반이상을 바치고도 각종의 세금을 내고나면 사실 빈털터리가 되었다.

어쩔 수가 없어서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등지로 이민을 떠나거나 근로보국대나 징용으로 끌려가고 고향에 남아있는 사람은 깻묵이나 풀죽으로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정도였다.

2) 익산의병의 독립전쟁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속에서도 익산의 민초들은 1907-1914년 까지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 문용기 열사 동상이 있는 익산 남부시장 인근 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사진 = 오명관)

여산, 금마, 황등, 용안, 함라, 춘포 등 10여 곳에서 결성된 익산지역의 의병들은 팔봉, 강경, 관동마을의 일대에서 이규홍, 박이환을 중심으로 발대한 익산의병은 천호산을 넘어 비봉면의 불당구렁에 이르러서 완주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완주, 무주일대의 해산의병을 모아 통합하니 천여 명의 연합 의병으로 재편됐다.

1909년에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공격해 오는 1만여 명의 일본군을 남한의병 토벌대와 천호산 넘어 불당구렁 가경제와 운장산 일대로 불러들여 공격 후 후퇴하는 방식으로 협곡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으로 일본군 기마부대 13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익산의병은 종국에 이르러 대전시 남쪽에 있는 식장산 까지 밀려갔다. 1909년 12월 식장산 장군바위 아래에서 처절하게 해산하게 된다.

이 후에도 완주군 비봉면 소재지를 본부로 각 곳에 비상연락망을 구축하고 주재소나 우체국 일본인 대농장 친일분자 기업 농장 등을 처단해 나가기 위한 활동을 전개 하는 등 상해 임정과 만주에 산제한 독립운동 단체등과 연계하고 군자금을 모아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다방면으로 조국해방을 위한 투쟁을 펼쳐 나갔다.

3) 3.1 만세운동의 불씨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쯤 미국의 월슨대통령은 세계평화질서의 이념으로 약소민족의 자결주의를 선포한다.

이 제안으로 각처의 약소민족들의 자주독립정신을 고무시켰고 우리민족에도 3.1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때 마침 고종황제의 사망원인이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돌고 도교에서는 일본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이 결행돼 3.1독립운동의 불길이 앞당겨 졌다.

1918년 12월 독립선언을 추진하던 일본유학생들의 국내방문으로 그 뜻을 같이하던 중앙고보교사 현상윤과 교장인 송진우가 보성교보 교장 최단과 만나 협의해 급진전하게 된다.

이들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과 이일을 시작하고 이듬해 천도교와 기독교의 지도자 오산고보 교장 이승훈과 감리교 지도자 등과 만나면서 불교의 혁신파 한용운과 최단이 만나면서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가 합류하게 됐다.

세계정세에 민감하던 국내의 엘리트급 학생층에서 따로 독립선언계획이 있었다. 3.1운동을 추진하던 지도자들은 마지막 단계에서 학생들을 끌여들여 만세운동의 전위대로 나서게 했다.

1919년 오전 11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이 파고다공원에 모인 학생대표들과 거의 같은시각 미리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서 스스로 경찰에 연락해 구금을 자초했다. 같은시각 파고다공원에 구름처럼 몰려있던 군중들은 민족대표를 기다리다 지친 학생대표가 독립선문을 낭독하게 됐다.

급기야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일제의 억압과 고통의 사슬을 끊고 한점의 불꽃이 요원을 불태우듯이 삼천리 방방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학생, 농민, 근로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국민이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하늘을 솟구쳤다.
일본 헌병의 총칼에 맞아 쓰러지면 일어나고 쓰러지면 또 일어나는 백전불굴의 정신으로 자손만대 민족번영을 이루어 나가기 위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대한의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거족적 조선독립만세 운동이 익산에서도 펼쳐졌는데 이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3월 3일에는 여산과 웅포 장에서 일어났고 3월 10일에는 여산 읍과 16개 면 전역에서 소규모적인 그룹시위가 일어났다.

3월 16일과 18일에는 금마장과 3월 27일에는 춘포와 삼기, 황등 지역에서 독립을 갈망하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28일 이후부터는 사람들이 집결하는 공공장소나 익산역(당시 이리역)을 중심으로 점점 가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급기야 4월 4일에는 수 천 명의 시민들이 격렬한 군중대회를 전개해 나가다가 6명이 순국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고 개정병원으로 이송됐으며 교회지도자 수십 명이 이리경찰서 지하 감방에 구금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삼기 서두교회 당회장 마루덕 선교사와 군산선교부의 고현교회 동련교회 당회장인 전 위렴 선교사 등의 활약으로 이 사건이 쉽게 수습될 수 있었다.

위 글은 2011년에 익산독립운동기념사업회 황성근 대표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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